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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호 선생의 공개서한에 대한 이종찬 광복회장의 회신
※ 본 서한은 지난 6월 30일 이인호 선생이 한 인터넷언론에 기고한 “1919년 건국절 거두시라” 제하의 공개서한에 대한 이종찬 광복회장의 회신입니다.[광복회]
이인호 선생이 나에게 보내온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
존경하는 이인호 선생.
교수라 호칭하는 게 좋을지, 대사가 좋을지, 이사장이 좋을지 한참 망설이다가 선생으로 하겠습니다. 공개적으로 보내주신 우정 있는 설득 (영화명 Friendly Persuasion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다”라는 나의 주장에서 물러나라는 충언에 대하여 회신합니다.
“당치도 않는 요청을 다시는 나 말고도 누구에게도 하지 마시기”를 강력하게 우정 어린 설득으로 회신하고자 합니다.
문득 펜을 들고 글을 쓰려는데 눈에 들어온 소책자가 보입니다. 『너희가 임시정부를 아느냐?』라는 제목의 소책자, 정정화 여사가 쓰신 글입니다.
정정화 여사는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신 이래 여성의 몸으로 10년간 일제 감시를 피하면서 여섯차례나 국내외를 오가며 비밀지령문이나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위해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정 여사는 1932년 윤봉길 대 거사 이후 임시정부가 중국의 내지로 장정(長征)을 할 때, 부군 김의한 선생을 따라 나선 분입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신 평범한 아주머니였지만 혁명여성이셨습니다. 그 분이 임시정부를 온당하게 평가하지 않는 분들에게 한마디 한 글입니다. 안이하게 세월 좋을 때 외국에서 석사, 박사 하신 분들의 글과 비교할 때 그 진지함이나, 절실함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나도 가급적 그분의 분노하는 마음을 담아 조심하면서 이 글을 쓰겠습니다.
존경하는 이인호 선생.
선생의 공개서한을 읽으면서 선생은 근본적으로 나의 말뜻을 잘못 인식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 했지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1919년을 기준하면 4352년 전 이미 건국한 나라입니다. 기미년 3.1독립선언서를 보세요.
“조선건국 4252년 3월1일 조선민족대표” 이 것이 독립운동 하셨던 모든 분들의 일치된 건국년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똑같이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건국년도를 1919년으로 하겠습니까?
1920년 2월23일 임시의정원 제7차 회의에서 단군기원을 중심으로 10월3일을 건국기원절로 결정했습니다.
이게 오늘의 우리가 섬기는 개천절로 승계된 것입니다.
사실은 하늘이 열린 날이란 의미이므로 건국일이라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만 이를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선생이 말한 1948년 건국은 더더욱 무리한 주장입니다. 독립운동 하셨던 어느 누구도 1948년 건국이라 말한 사실이 없습니다.
이 선생께서도 시인하는 바와 같이 이승만 초대대통령은 초대 국회의장으로 국회개원식날 개회사에서 “이 국회에서 건립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의 임시정부의 계승(繼承)에서 이 날이 29년 만에 민국의 부활일(復活日)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여 민국년호(民國年號)는 기미년에서 기산(起算)할 것이요” 라 분명히 밝혔습니다. 솔직히 내가 말한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말한 것은 내 말이 아니고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말을 반복한데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하시고 건립위원으로 나서신 선생께서 이승만 대통령의 말씀을 거부하고 딴 말로서
그 분을 덧칠한다면 이거야말로 위험천만한 일 아닙니까?
이인호 선생.
선생은 우리나라의 드문 영재로 미국 최고 명문 하버드대에서 서양사로 박사학위를 받아서 우리 모두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묻겠습니다.
나는 역사란 영속되는 것이지 단절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데 동의하시는지요? 가령 오늘의 대한민국은 멀리는 고조선부터 가깝게는 대한제국,
조선왕조부터 영속되어 온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태극기는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아요.
다만 군주의 나라가 국민의 나라로 발전은 됐지만 나라 자체는 영속됐다고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능한 국제법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1905년 8월 청년 이승만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미국과 조선 양국이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규」에 명시된 거중조정 항목을 들어
미국이 일본의 한국침략야욕에 거중조정하여 독립국으로 유지케 해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 이후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회 위원장인 정부대표로 대미외교를 펼치면서도 항상 이 거중조정을 들어
미국이 한국 독립을 위해 역할을 할 것을 촉구합니다. 역사는 왕조시대 맺은 조약이라도 항상 유효하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1948년 건국을 했다면 역사를 단절시킨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조미수호조규도 대한제국의 종말과 동시에 효력이 끝납니다.
이인호 선생 왜 인위적으로 역사를 단절시킵니까?
북한은 1948년에 건국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우리 역사에서 이단의 길로 처음부터 가려고 했으므로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들의 헌법을 보면 의도가 분명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이시다.”라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길을 따르지 않기로 했고 국기도 따로 제정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대한민국은 우리 역사의 적손(嫡孫)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단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민족사적 정통성을 가진 나라입니다.
나는 선생께서 구태여 북한과 동격으로 건국으로 가자는 주장은 이단과 겨루자는 것에 불과하므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승만대통령도 제헌국회 초기부터 다른 길을 분명하게 제시했습니다. 그 분은 “기미년 3월 혁명에 궐기하여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에 선포하였으므로
그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의 조국 재건을 하기로 함”이라는 문구를 넣어달라고 국회에 요청합니다. (국회속기록 단기 4281년 7월1일자 )
국회 헌법제정 특별위원회는 이문구를 가다듬어서 제헌헌법 전문에 1948년 7월7일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로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본회의에서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로 바꾸어 통과했습니다.“(속기록 7월7일자) 이승만 대통령의 원대한 역사의식이 반영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역사계승론자였고, 김일성은 왕조 창건 시조론자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원대한 역사인식을 다시 김일성의 시조론으로 바꾸자는 것이 1948 건국론입니다.
왜 북한을 따라 이단의 길로 가자는 것입니까? 민족사적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이를 버리려는 저의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압축해서 설명한다면 을사늑약이후 늑약반대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하여 전국적인 일제 항거가 불이 붙었습니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할 때까지는 나라를 찾는다는 것은 왕정복고적이었습니다.
물론 입헌군주제로 발전할 수는 있었겠지만 어쨌든 왕정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1919년 이후 국민의 마음은 확연하게 민주공화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거기에 대한제국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국민적 동의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어 있으므로 정부의 역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임시정부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 서울에서 13도 대표가 모여서 한성임시정부를 세웠는데 그 정부는 대통령제(집정관 총재라는 명칭으로)이고,
상해임시정부와 러시아에서 세운 국민회의정부 모두 총리제였습니다. 1919년 9월 3개 임시정부가 합해져서 제도는 한성정부의 것을,
인사는 러시아의 정부의 것을, 위치는 상해에 두기로 합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된 것입니다.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가 승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헌국회 개회사에서 “서울에서 세운 민국정부의 부활 운운”은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인호 선생.
선생은 대사를 두 곳에서나 역임한 외교관이시기도 합니다. 65년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에서 합의한 한일기본조약에 가장 민감한 조항을 잘 아실 겁니다.
「기본조약」 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강제로 체결된 것이므로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고 우리정부는 밝혔습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영문조약문의 ‘already null and void’라는 표현을 ‘もはや無效 (이제는 무효)’라고 해석합니다. 그리하여 1948년 8월 15일 한국이 건국되어 효력이 상실되었고, 1965년 한일양국이 무효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이 선생의 주장과 같은 것이 빌미가 되어 건국론을 냉큼 받아드려 1948년 건국으로 효력이 상실되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 선생은 이 일본 측 입장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이 선생! 이런 식으로 일본 측에 유리하게 ‘건국’을 고집하여도 무방합니까?
나는 우리 역사가 영속되었고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계속하여 피해를 당해 왔습니다.
대한민국은 일제 군사적 강점으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여 임시정부만 존재했지만 1948년에 임시정부가 정식 정부로 진전된 것일 뿐입니다.
계속하여 일제와 강제로 체결된 모든 조약은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분명하게 역사를 정리하자는 것입니다.
이인호 선생, 왜 구차하게 건국이란 말을 넣어서 일본의 주장을 합리화합니까?
이인호 선생.
그 외에도 제가 지적할 말이 많지만 이만 줄입니다.
이 선생은 조선왕조가 끝나고 일본의 강점을 인정하고, 1948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서 많은 국민이 피해를 당합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선생의 말대로 하면, 연합국에 매달려 독립시켜달라고 외교만 하면 됐지, 독립운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테러리스트의 짓이 됩니다.
만약 일제 강점기를 부인치 않고 우리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여도 좋다면 큰 혼란이 일어납니다.
우리 국민은 본의 아니게 일본 신민(臣民)으로 전략하게 되고 더욱이 위안부 할머니의 인권은 일본의 내부문제이지 우리가 항의할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강제 징용은 일본이 자국민을 혹사한 것일 뿐 우리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됩니다.
이 선생은 저의 주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타락한 진보적 역사관”과 궤를 같이 한 것이라 비난했는데 큰 착각입니다.
김일성 노선을 따르는 종북 좌파나 아니면 과거 국정역사교과서 만들겠다고 날뛰던 자칭 우파같은 천치 역사학자면 몰라도 건전한 보수나 진보,
아니면 좌나 우나 할 것 없이 민족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저와 생각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오히려 이 선생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주장이 혹시 “대한민국은 일제가 강점해서 더 잘살게 되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과 근사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선생의 주장 194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성립되었다고 하는 주장을 계속 고집하신다면
결과적으로 독립운동하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취지에 역행하시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이인호 선생!
틈나시면 정정화 여사의 피나는 27년동안 임시정부를 지킨 이야기를 한번 읽어보시고 1948년 대한민국 건국론이 맞는지 다시 한 번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원년은1919년이다.”라고 생각을 바꾸었다는 소식을 나에게 전해주실 것을 기다리겠습니다.
대한민국105년 7월 1일 광복회장 이 종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