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5월 독립운동가

05월의 독립운동가

채찬 / 김창균 / 장창헌 / 이춘화(미상 ~1924 / 1899 ~미상 / (1884) ~1924 / (1896) ~192)

훈격 :건국훈장 독립장/독립장/애국장/애국서훈년도 :1962/1995/1995/1995

1922년 통의부에 가담하여 중대장으로 무장투쟁 지속

1924년 참의부를 설립하고 사이토총독 암살 시도

통의부원으로 국내진입하여 경찰부 수색대 저격

1924년 참의부에서 활동하며 국내진격 등 활발한 군사활동 전개

1924년 참의부 제1중대원으로서 일경과 교전 중 동지들과 함께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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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찬 / 김창균 / 장창헌 / 이춘화

채찬 , 미상 ~1924 , 독립장 (1962)김창균 , 1899 ~미상 , 독립장 (1995)장창헌 , (1884) ~1924 , 애국장 (1995)이춘화 , (1896) ~1924 , 애국장 (1995)

1. 참의부의 사이토 총독 저격 사건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육군주만참의부(이하 참의부로 통칭)는 압록강 건너 서간도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한 무장독립운동단체이다. 참의부의 무장투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사이토 총독 저격 사건이었다. 이 투쟁은 총독을 죽이지는 못했고 작전의 규모도 크지는 않았으나 우리 민족과 독립운동계에 적지 않은 용기를 일으켰고 반대로 일본 측에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다. 3.1독립운동 직후 부임하여 이른바 문화정책을 실시하는 등 우리 민족을 회유하려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자신의 치적과 성과를 살피고 국경지방의 경비상태를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서북지방을 시찰했다. 총독 일행은 함경남도 혜산 등지를 돌아보고 1924년 5월 19일 지방유지를 비롯하여 신문기자, 다수의 경찰관을 이끌고 두 척의 경찰순시선에 나누어 타고 압록강 상류에서 신의주를 향하여 국경을 시찰하는 중이었다.

정보를 탐지한 참의부 참의장 채찬(蔡燦, 백광운)은 제2중대 장창헌(張昌憲)에게 총독 사살을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창헌은 제1소대장 참위 한웅권(韓雄權, 이명 이의준), 오장 이춘화(李春化), 일등병 김창균(金昌均)·현성희(玄成熙)·이명근(李明根)·김여하(金呂河)·전창식(田昌植) 등을 급파했다. 이들은 평북 강계군 고산면 남산동 마시탄의 건너편인 봉천성 집안현 소량곡 팔합목에 매목한 후 총독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들이 매복한 지역은 압록강이 한눈에 보이는 절벽으로 적의 순시선을 저격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오전 9시경 두 척의 배가 눈앞에 나타나자 잠복해 있던 참의부 독립군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당황한 일제 경찰은 제대로 응전조차 못한 채 사격권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다. 총독을 저격 사살하려던 독립군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기습에 크게 놀란 일제 경찰은 수색대를 편성하여 독립군을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독립군들은 각기 부대를 나누어 일제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부대로 복귀하였다. 이때 사이토 총독은 생명만 겨우 보전했고, 그해 6월 열리는 일본 국회에서 예정되었던 조선통치의 성과를 보고하지 못하고, 저격 사건의 상황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야 했다. 사건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신문》을 비롯한 당시 신문들은 이를 대서특필로 보도하여 한민족의 항일의식을 크게 고무시켰다.

참의부 독립군들은 사이토 총독 저격 투쟁뿐만 아니라 남만주일대의 무장투쟁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우항령전투·황청동전투·이평면전투·남동전투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무장투쟁을 통해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으며, 일제의 주요기관을 파괴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등 치열한 무장투쟁을 수행하였다. 제2중대 특무정사 이수흥의 경우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서울과 경기도 지방에서 3천여 명이 동원된 삼엄한 계엄 상태 속에서도 3개월 동안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적을 유린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체포된 후 순국하였다.

2. 사이토 저격의 주역들 – 채찬, 김창균, 장창헌, 이춘화

채찬(미상-1924)은 일찍이 이강년 의병장을 따라 의병 투쟁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였다. 졸업생들과 함께 통화현 쏘배차의 백서농장에서 농감(農監)으로서 둔전제를 통한 군대를 양성하였다. 이후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에 주력하면서 주로 백광운(白狂雲)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0년 서로군정서 본부가 길림으로 이동한 후에도 남만주지역에 남아 신용관(신광재)·김소하(장기초) 등과 함께 국내에 진입하여 적 기관 파괴와 밀정 처단에 힘썼다. 1921년 신용관이 병사한 이후에는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상해의 「독립신문」에 자금을 지원했다.

통의부 의용군 훈련 광경(1922년)
통의부 의용군 훈련 광경(1922년)

남만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통의부가 결성된 이후에는 통의부의용군 제1중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통의부가 의군부와의 갈등으로 대립하게 되자 백광운은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서 오로지 무장투쟁에만 전력한다는 입장 아래 각 중대의 중지를 모아 스스로 대표의 일원이 되어 상해 임시정부를 방문하고 참의부를 임시정부 소속으로 편제시켰다. 그는 제1중대장으로서 참의장을 겸임하고 무장투쟁에 매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24년 5월 조선총독 사이토가 국경지방을 시찰한다는 정보를 탐지하고 장창헌에게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이토의 저격에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은 우리 민족과 독립운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고 일본 측으로서는 심각한 충격과 함께 그들이 큰소리치던 총독정치가 실패했음을 자인하게 만들었다.

사이토 저격 사건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인 1924년 9월 21일 채찬은 참의부 본부 주둔지에서 무장투쟁 단체 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피살되었다. 그의 피살 사실은 「독립신문」에 발표되었고 독립운동계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신흥무관학교 시절부터 채찬을 지도했던 이시영은 「독립신문」에 애절한 추도사를 남겼다.

“하늘이여 ! 하늘이여 ! 우리의 대업이 아직 성취되지 못한 날에 우리 일꾼의 건장(健將)을 잃게 함은 누구나 통석(痛惜)을 금치 않으리오.” 국토를 광복한 후에 가정을 갖겠다던 채찬은 칠십 노모를 남겨두고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김창균(1899-미상)의 독립운동은 대한독립단 가입으로 시작되었다. 대한독립단은 전날의 의병장들이 주도하여 1919년 4월 15일 유하현 삼원포에서 결성되었다. 김창균은 1922년 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가 강계 청풍동의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일제와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는 한편, 밀정 송의봉을 처단하였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김창균)ⓒ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김창균)ⓒ국사편찬위원회

1922년 8월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자 통의부의용군에 참여하였다. 그는 1923년 6월 강계군 어뢰면에서 적 경찰대와 교전하고 강계·후창 등의 영림서를 습격하는 등 적 기관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24년 5월 19일 참의부 참의장 백광운의 명령에 따라 장창헌의 인솔 아래 압록강을 순시 중인 조선총독 사이토 저격 투쟁에 참여하였다. 이후 1924년 7월 위원군 화창면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무장투쟁을 수행하는 한편 국내 각지를 전전하면서 군자군 모집에도 힘썼다.

장창헌(1884-1924)은 일찍부터 대한통의부 의용군에 참여하였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 직속의 육군주만참의부에 참여하였는데, 참의부는 무장투쟁을 통한 국내 진공 작전에 주력하였다. 주로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의 의주·초산·강계·선천·위원·태천·용천·자성 등 일제 주재소 습격과 밀정 처단을 수행하였다. 이는 참의부 독립군 가운데 평안도 출신들이 많아 지리에 익숙했으므로 게릴라전을 수행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1924년 5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그의 치적을 선전하기 위해 국경 지역을 순찰한다는 첩보를 참의부에서 탐지하게 되었다. 참의장 채찬은 제2중대 장창헌에게 총독을 사살할 것을 명령하였다. 명령을 받은 장창헌은 제1소대장 한웅권을 비롯한 참의부 독립군을 인솔하고 순시선의 속도가 낮아지는 강 절벽 위에 잠복하였다. 두 척의 순시선이 나타나자 참의부 독립군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총독의 저격에는 실패했으나 독립군들은 부대를 나누어 분산한 후 일제 수색대의 경비망을 뚫고 유유히 부대로 복귀하였다.

1924년 7월에는 이백파·이성빈·이춘화 등 대원을 인솔하고 강계군 종서면 황청동으로 진출하여 적과 교전 중 친일파 한시항·김성로· 이기화를 사살하고 가옥을 소각하는 등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전투에서 장창헌은 이춘화·이용연·김용규 등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이춘화(1896-1924)는 일찍부터 장창헌과 함께 대한통의부에 참여하는 등 무장투쟁의 동지로서 생사를 함께 했다.

적 수괴 사이토를 습격(독립신문 1924년 5월 31일자)ⓒ독립기념관
적 수괴 사이토를 습격(독립신문 1924년 5월 31일자)ⓒ독립기념관

1924년 5월 19일 사이토 총독 일행이 국경을 시찰한다는 첩보를 탐지한 참의부에서는 장창헌에게 총독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춘화는 저격조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평북 강계군 마시탄 여울의 건너편인 집안현 소량곡 팔합목 절벽 위에 은밀히 매복하여 총독 일행을 기다렸다. 두 척의 순시선이 나타나자 독립군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불행하게도 사정거리가 멀어 총알은 압록강 물위에 떨어지고 총독 일행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였다. 이춘화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부대를 분산한 후 일제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부대로 복귀하였다.

사건 후 우리 독립운동계는 크게 고무되었고 상해의 「독립신문」에는 ‘적 수괴 사이토를 습격(敵魁 齋藤을 襲擊 !)’이라는 타이틀로 대서특필되었다.

3. 육군주만참의부와 무장투쟁의 전개

서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을 치른 후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단체의 통합이 절실했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것이 1922년 8월 30일 결성된 ‘대한통의부’다. 군대 명칭은 ‘대한통의부 의용군’이다.

통의부는 여러 단체들이 모여 결성되었기 때문에 지도자들 간에 공화(共和)와 복벽(復辟)이라는 이념의 대립, 군권(軍權)과 인선(人選)을 둘러싼 내부갈등이 계속되었다. 복벽계는 전덕원을 중심으로 의군부로 분립되었다. 이러한 내부갈등에 회의를 느낀 통의부의용군 5개 중대 가운데 4개 중대가 오로지 대일무장투쟁에 전심한다는 목표아래 스스로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육군주만참의부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참의부 조직은 처음부터 무장투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조직으로 출발하였다. 선임 중대장이 참의장을 겸임하였는데, 참의부 5개 중대는 통의부 의용군 시기부터 각각 출신 배경이 다른 부대, 즉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천마산대·의병단 등이 연대하여 결성되었기 때문에 각 중대장의 독립된 부대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5개 중대는 연합작전을 통해 공동의 목표인 적극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차질없이 전개했다.

이들은 설립 초기부터 끊임없는 국내 진공 작전을 통해 적 기관 파괴와 밀정 처단에 주력하였다. 참의부가 벌인 대일투쟁은 게릴라전(遊擊戰)의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타국(중국) 땅에서, 또한 무기와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강대한 일본 정규군과 정면으로 대결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항일 무장투쟁의 유효한 전략인 게릴라전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교란하고 민중의 항일정신을 지속적으로 고무하여 세계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전달했다. 이러한 독립군의 활동은 만주지역에서 일본 정규군 몇 개 사단의 발을 묶어 놓았고 일제의 군사전략이 지닌 약점을 드러냈다.

국경시찰중인 사이토 총독 일행에게 발포(동아일보 1924년 5월 20일자)ⓒ국사편찬위원회
국경시찰중인 사이토 총독 일행에게 발포(동아일보 1924년 5월 20일자)ⓒ국사편찬위원회

참의부에서는 무장투쟁을 최우선으로 하였으나 점차 교민자치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 체제하에서 한인 교민들에게 의무금을 징수하여 군비에 충당하고 지방에는 경호대를 중심으로 교민들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또한 곳곳에 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자녀들의 교육에 힘쓰고, 병원을 세우는 등 교민들의 복지에도 노력하였다. 부족한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정비소·약방 등을 운영하고 교민들의 실업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참의부는 이른바 ‘독립운동 근거지’건설을 통한 만주 무장투쟁의 중요한 토대이자 요람으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대일항쟁시기 한민족은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은 그 방략에 따라 외교활동·실력 양성 운동·무장투쟁·의열투쟁 등 다양한 형태로 추진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일관되게 민족 독립운동의 기본노선이 되었던 것은 무장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장투쟁은 한말의 의병항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의병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만주 각지와 연해주 등지로 피신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들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 독립전쟁을 통해 민족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론’의 깃발 아래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였고, 서북간도 지역이 그 중심이 되었다. 이들에 의해 국내 진공 작전을 비롯하여 봉오동·청산리전투 등과 같은 일제와의 직접적인 독립전쟁이 수행된 것이다. 참의부는 통의부 의용군 출신의 군인들이 자발적으로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성립된 특별한 무장투쟁 부대라 할 수 있다. 특히 사이토 저격 사건을 비롯한 국경지대의 항일 전투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참의부 활동의 민족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